[ Volvo ] 볼보 : 나는 구른다

로마시대 마차의 빈티지 사진, 라틴어

바퀴가 지면 위에 남기고 가는 무수한 궤적을 가만히 눈으로 좇아본 적이 있다. 멈춰선 자리에서는 결코 그려낼 수 없는, 오직 굴러야만 완성되는 그 무늬 속에는 정지가 아니라 지속이야말로 생의 본질이라는 오래된 진리가 새겨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굳게 닫힌 자리에 머무르기보다 끊임없이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원의 움직임, 그 순환하는 힘이야말로 인류가 문명을 밀고 나간 가장 근원적인 동력이었을 것이다. 오늘은 멈추지 않고 스스로를 굴려 세상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담담한 선언, '나는 구른다(Volvo)'가 건네는 지속의 미학을 사유해보고자 한다.

몰랐던 자동차 브랜드의 진짜 뜻 ① — 브랜드 속 라틴어

볼보(Volvo)는 왜 ‘나는 구른다’는 뜻일까

도로를 지나다보면 많이 눈에 띄는 볼보가 라틴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 'Volvo'라는 이름이 라틴어에서 왔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수십 년째 익숙하게 불러온 이름이었는데, 정작 그 뜻은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어원: '구르는' 뿌리에서 갈라진 단어들

집에 돌아와 사전을 펼쳐보니, volvo는 라틴어 동사 volvere(구르다, 회전하다)의 1인칭 단수 현재형이었습니다. volvo, volvere, volvi, volutum으로 활용되는 3변화 동사로, 문자 그대로 옮기면 '나는 구른다'는 뜻입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동사의 어근 volv-가 영어 단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회전한다는 뜻의 revolve, 진화한다는 뜻의 evolve, 혁명을 뜻하는 revolution, 말이 술술 이어진다는 뜻의 voluble, 반란을 뜻하는 revolt까지, 전혀 다른 의미처럼 보이는 이 단어들이 모두 '구르고 도는' 하나의 라틴어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걸 알고 나니, 익숙했던 영어 단어들이 새삼 다시 보였습니다.

기원: 자동차보다 먼저 굴렀던 이름

그런데 이 이름이 정작 자동차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은 더 놀라웠습니다. Volvo라는 상표는 1915년, 스웨덴의 볼베어링 제조사 SKF(Svenska Kullagerfabriken)가 자사의 볼베어링 제품 라인을 위해 먼저 등록한 이름이었습니다. 세계 곳곳으로 수출하려면 어느 나라에서든 발음하기 쉬운 이름이 필요했고, '나는 구른다'는 뜻의 라틴어 동사만큼 둥글게 회전하는 베어링의 본질을 담아낼 단어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SKF 소속이던 Assar Gabrielsson과 Gustaf Larson이 자동차 사업을 제안했고, 회사의 승인을 받아 1927년 4월 첫 자동차가 생산되면서 비로소 우리가 아는 자동차 브랜드 Volvo가 탄생했습니다. 이 이름은 자동차보다 12년 먼저, 이미 '구르는 것'의 이름으로 살고 있었던 셈입니다.

인용구로 만나는 volvere

라틴어 문헌 속에서 volvere가 어떻게 쓰였는지 찾아보다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1권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만났습니다. 유노 여신이 트로이아인들을 미워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그들의 후손이 리비아를 멸망시키러 오리라는 운명을 이렇게 전합니다.

"sic volvere Parcas"

운명의 여신들이 그렇게 굴리고 있으니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1권 22행

여기서 volvere는 운명의 여신들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실을 손안에서 굴리고 풀어내는 모습을 그립니다. 삶의 방향은 한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이 꾸준히 굴려나가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다는 이미지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같은 시집 9권에서는 또 다른 쓰임을 발견했습니다. 여신의 사신 이리스가 투르누스에게 기회가 왔음을 알리는 대목입니다.

"volvenda dies en attulit ultro"

어떤 신도 감히 약속하지 못했던 일을, 굴러오는 날들이 스스로 가져다주었다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9권 6–7행

여기서 dies, 즉 '날'이라는 시간 자체가 volvenda, 굴러야 마땅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시간은 가만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바퀴처럼 굴러가며 기회를 실어 나른다는 발상이었습니다. 두 인용구 모두 같은 동사를 쓰고 있지만, 하나는 운명을, 하나는 시간을 굴리고 있었습니다.

바로잡아 두면 좋을 사실

여기서 한 가지 바로잡고 싶은 오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Volvo를 무언가의 약자이거나 자동차 회사가 새로 지어낸 조어라고 짐작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완전한 형태를 갖춘 라틴어 동사 활용형입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이름을 처음 쓴 주인공은 자동차가 아니라 볼베어링이었습니다. 브랜드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 흔히 자동차 회사가 이름을 만든 것처럼 소개되곤 하지만, 정확히는 이미 존재하던 이름을 자동차가 물려받은 쪽에 가깝습니다.

오늘에 건네는 문장

이 모든 걸 알고 나니, 볼보라는 이름을 다시 보게 됩니다. 베어링이든 자동차든, 이 브랜드는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로 멈춰 있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 형태로 굴러온 셈입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지금의 나 자신이 최종 형태가 아니라, 여전히 구르고 있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조급함이 조금은 누그러집니다. 중요한 건 완성된 모습으로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잃지 않고 꾸준히 다음 자리로 굴러가는 일일 것입니다.

logbook-latina의 사색

가끔 운전대를 잡은 사람들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살아온 세월의 상당 부분이 결국 멈추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굴러가는 시간들이지 않았을까. 늘 어딘가를 향해 가고있는 우리들,  그 바퀴가 단 한 번도 완전히 멈추지 않고 계속 회전해왔다는 사실이 삶의 궤적이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화려한 질주의 순간도 있고, 크고 작은 굴곡 위에서도 꾸준히 자신을 굴려내는 우직한 질주도 있다. 멈춰선 바퀴는 아무리 견고해 보여도 그 자리에서 서서히 녹슬어갈 뿐이지만, 느리더라도 끊임없이 구르는 바퀴는 마모되면서도 끝내 다음 길을 열어낸다.

그러니 나이가 든다는 것은 속도를 늦추는 일이지 구르기를 멈추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어제보다 조금 느릴지언정, 스스로를 다시 한번 굴려 내일의 길 위로 나아간다. 그것이야말로 내 남은 생이 잃지 말아야 할 가장 담백한 동력, '나는 구른다(Volvo)'의 정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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