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at ] 피아트 : 이루어지다

연설하는 로마인 빈티지 사진, 라틴어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지는 말이 있다. 옛 법정에서 판관이 마지막 문장을 낭독하기 전까지, 진실은 그저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허공에 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선고가 선포되는 찰나, 흩어져 있던 가능성들은 일제히 하나의 현실로 응고되어 더는 물러설 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그렇게 선포되기만을 기다리며 웅크린 결정들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망설임을 끝내고 세상을 향해 내리는 단호한 선고, '피아트(Fiat)'가 지닌 결단의 무게를 사유해보고자 한다.

피아트(Fiat) 뜻과 유래, 선언이 빚어낸 이름 ③ — 브랜드 속 라틴어

Fiat,바람이 아닌 선언이 빚어낸 이름

'만들다'가 아니라 '되어지다'

자동차 브랜드 이름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이번 시리즈에서, 이번에는 유독 낯익은 단어 하나가 눈에 밟혔습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자동차 브랜드 '피아트(Fiat)'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라틴어 사전에서 찾아보니,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완전한 하나의 문장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피아트(fiat)는 '만들다, 하다'라는 뜻의 능동사 파케레(facere)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되다, 이루어지다'라는 뜻의 피에리(fieri)의 3인칭 단수 현재 접속법 형태입니다. 즉 누군가 무언가를 직접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어지도록 하라는, 결과를 향한 선언에 가까운 문법 형태인 셈입니다. 흔히 명령형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엄밀히는 접속법이며, 그래서 '~하라'는 강제보다 '~이 이루어지기를'이라는 의지가 담긴 선포에 더 가깝습니다.

창조의 명령과 자동차 공장의 우연

이 짧은 한 단어가 서양 문명에서 가장 강렬하게 쓰인 순간은 아마도 창세기의 천지창조 장면일 것입니다. 라틴어 불가타 성경은 '빛이 있으라'는 신의 첫 명령을 '피아트 룩스(Fiat lux)'로 옮겼습니다. 혼돈 속에서 오직 말 한마디로 질서와 빛을 불러온 이 장면 이후, 피아트는 신학에서 '명령에 의한 창조(creation by fiat)'라는 개념어로 굳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자동차 브랜드 피아트는 이 신성한 선언을 브랜드 철학으로 삼은 것일까 궁금해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회사명 자체는 189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조반니 아넬리 등이 설립한 회사의 정식 명칭 '파브리카 이탈리아나 아우토모빌리 토리노(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 토리노 이탈리아 자동차 제작소)'의 머리글자를 딴 약자입니다. 창세기의 그 유명한 선언과 철자까지 완벽하게 겹치는 것은 신기하게도 의도된 언어유희가 아니라 우연의 일치에 가깝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Dixitque Deus: Fiat lux, et facta est lux."
(신께서 말씀하시길,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 창세기 1장 3절, 불가타 성경

"Fiat justitia ruat caelum."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라, 설령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 서양 법언(法諺), 문헌상 최고(最古) 기록은 William Watson, 1601

알아두면 좋은 오해 두 가지

이 문구를 살펴보다 보면 두 가지 흔한 오해와 마주치게 됩니다. 첫째,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동차 브랜드 피아트가 라틴어의 철학적 의미를 담아 의도적으로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근거는 없으며 약자가 우연히 라틴어 단어와 일치한 경우에 가깝습니다.

둘째, '피아트 유스티티아 루아트 카일룸' 역시 고대 로마의 정치가나 세네카의 저작에서 유래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 문헌들에는 이 문구가 등장하지 않으며, 문헌상 가장 오래된 기록은 17세기 초 영국의 저작에서 발견됩니다. 라틴어 격언들은 그 위엄 있는 울림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오래되고 유서 깊은 것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훈

피아트라는 단어가 오늘날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무언가를 진짜로 이루고 싶다면, 마음속으로 바라기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하면 좋겠다'는 소망의 언어를 '~하겠다'는 선언의 언어로 바꾸는 순간, 비로소 변화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신이 혼돈 속에서 '빛이 있으라'고 선언했을 때 빛이 뒤따랐듯,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오래 미뤄둔 다짐을 입 밖으로 꺼내어 선포하는 그 작은 '피아트'의 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logbook-latina의 사색

생각해보면 언젠가는, 조만간에는 하며 마음속으로만 되뇌던 바람들은 입 밖으로 꺼내는 문턱을 넘지 못하고 서랍 속 오래된 서류처럼 켜켜이 쌓여있는 것들이 많이있다. 그렇게 미뤄둔 다짐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바래어, 언젠가 이룰 수 있었을 가능성마저 서서히 지워버리곤 한다.

'이루어질지어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피아트(Fiat)'는 바로 이 문턱을 단숨에 건너뛰는 말이다. 신이 혼돈 속에서 '빛이 있으라(Fiat Lux)'고 선언하자 곧바로 질서와 빛이 뒤따랐듯이, 피아트는 소망을 품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발화하는 즉시 현실을 빚어내는 단호한 명령형이다. 소망은 그저 마음의 온도를 데울 뿐 세상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선언은 스스로를 벼랑 끝에 세워 물러설 자리를 지워버린다.

결국 오래 묵혀둔다고 저절로 무르익는 다짐은 없다. 마음 깊이 벼려온 뜻을 마침내 입 밖으로 꺼내어 세상에 선포하는 그 짧고도 단호한 '피아트(Fiat)'의 순간에, 비로소 바람은 현실이라는 옷을 입기 시작한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라틴어 명언] 어원과 고대 아포리즘의 진짜 가치

[ PER ASPERA AD ASTRA ] 페르 아스페라 아드 아스트라 : 마침내 별에 이르다

[ Carpe Diem ] 카르페디엠 의 진짜 수확 : '오늘을 잡으라' 는 흔한 오해